아버님을 생각한다(최성장 전 이사장)
- 총동문회 관리자(82)
- 2013.04.0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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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崔奎東)을 생각한다.
崔 性 章(中東高等學校 理事長)
예고 없이 남침한 괴뢰군의 포화 속에서 수많은 동포들이 부모와 형제를 잃었다.
학살된 남편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목메어 통곡하는 민족의 소리. 평화를 유린하고 동족의 가슴에 총칼을 겨눈 붉은 매국노의 만행은 역사의 냉엄한 심판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국립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계시던 아버지께서 놈들에게 납치 살해되시고, 나는 평양에서 아버지의 묘지를 찾아 방황하였다.
아버님을 생각하며
6월 27일 오전 4시 경 찦차가 내 병원 대문 앞에 급정거하였다. 급한 환자가 온줄 알고 급히 문을 열고 보니 뜻밖에도 내 동생이었다. 동생은 평소에 보지 못한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사랑방으로 들어왔다. 동생은 무거운 입을 천천히 열며 비밀히 그 실마리를 풀기 시작하였다. 이때 방안에서 내 아내와 동생, 세 사람이 초조하게 앉아 있었다.
“형님 지금 아버지한테 갔었는데 공산 괴뢰군이 서울 가까이 쳐들어 왔으니 형님만 먼저 수원이나 대전방면으로 피난하라고 말하시니 지체할 것 없이 여기를 떠나도록 하십시오.”
동생은 숨을 헐떡이며 이렇게 재촉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물었더니 이 말엔 대답 없이
“아무튼 형님만 먼저 피하라고 하셨으니 급히 가십시오.”
하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님의 말씀대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곧 양복을 주서 입고 모시바지 저고리만 손에 들고 집을 나섰다. 내가 이 같이 집을 떠날 결심을 한 이유는 첫째 공산군의 침입으로 27일 오전 중에 비밀리에 한강철교를 폭파시킨다는 것. 둘째 기차는 오전 6시가 마지막 최종 열차라는 것이다.
나는 4시반경 집을 떠나서 도중 내 친구인 김성진 박사의 집에 들러서 이런 사유를 말하고 나 홀로 서울 역으로 걸음을 재촉하여 달음질 쳤다. 서울 역에 도착하여 보니 역구내는 가을바람이 부는 듯이 쌀쌀하고 침울한 냉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소위 고관 차와 국군 찦차가 줄달음친다. 역원들은 눈만 둥그렇게 뜨고 초조한 모습으로 무엇을 알리려 애쓰는 것 같다. 기차는 한 시간 연발이었다. 따라서 시간적 여유는 충분히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대학총장 관사에 전화를 걸고 또 걸고 세 번이나 전화로 병상에 계신 아버님과 같이 남하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아버님의 대답은
“너 먼저 가라”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어 나는 내 집으로 전화를 걸고 가족들과 이별의 정을 나누었다.
서울역 앞에서 당시 문교부장관을 지내셨던 최재유(崔在裕)선생을 만나서 떠나는 사유를 이야기하고 같이 가자고 말하였다.
그리고 아직 시간의 여유가 있기에 또 이병철(李秉喆)이와 몇몇 친구에 전화를 걸고 남하할 것을 말하였으나 그들은 다 주저하였다.
그들은 그 후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무서운 고생을 당하였던 것이다.
拉北의 행렬
이리하여 나는 서울을 뒤로하고 몸을 피하였으나 내 아버지는 그 후 일시, 세검정에 계신 내 모친 집으로 피신하고 있던 중 이때 성주(星州) 동향인이고 벽진면(碧珍面)에 사는 젊은 청년이요 하(河)라는 성을 가진 사나이에게 기어코 붙들려 가게된 것이었다.
그때 놈들의 정치보위부(현․국립도서관 자리)로 아버님은 끌려가서 좁은 감방 안에서 묵묵히 손을 이마에 대시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모습을 같이 감방살이를 하던 인사들이 전해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원래 천식으로 일생을 고통 중에 계신데다 좁은 감방에서 더욱 심한 천식과 하루 세끼도 못 잡수신 쇠약한 몸으로 어떻게 견디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적마다 자식의 마음은 더욱 안타깝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감방 속에서 놈들이 한사람 한사람씩 불러 낼 적에는 인사들은 모두 소름이 끼칠 만큼 불안에 떨었건만 내 아버지는 침묵 속에 고요히 앉아서 오로지 3천만이 아니라 온 이 겨레를 위하여 마음껏 슬퍼하고 하느님의 가호를 기원하고 계셨다 한다.
이리하여 9월 초순이 되자 놈들에게 무슨 변이 생겼는지 감방에 계신 내 아버님을 불러내서 트럭에 싣고 38이북 평양으로 강송하였다고 한다. 안동 고이적삼 병든 몸으로 트럭에 흔들리며 천리 길 평양으로 강송되어 가실 때 그 고통 그 슬픔 그 심정은 어떠하였으랴!
아버지를 찾아서
나의 형제는 남하하여 나는 부산 경주 밀양 등 각 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있으면서 아버지 찾기를 꾀하였고 내 동생 역시 부산에 있으면서 아버지 유해 찾기에 열심히 작전하고 기회만 있으면 형제가 모여서 의논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맥아더 장군이 적도 평양을 탈환하였고 그때 사회부장관이 평양을 직접 가서 시찰하고 그 광경이 각 신문지상에 보도되었다. 이때 신문을 자세히 보니 내 아버님 이름이 게재되어 있고 동시에 사망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안 우리 형제는 그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급히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 당시의 내무장관 조병옥선생은 현 조선일보 2층에 진을 치고 차관 홍헌표(洪憲杓)동지 역시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홍동지에게 가서 내가 평양을 갈 터이니 비행기를 구하여 달라고 말하고 조 장관에게도 아버님의 유해를 평양 가서 찾겠다고 비행기를 구하여 달라고 말하였다.
이때 조 장관 대답이 자기가 평양을 가서 시찰한 결과 도저히 찾기가 불가능한 일이니 가지 말라고 나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때 매우 불쾌감을 느꼈다.
다음날 다시 홍 차관에게 졸라보았으나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말 뿐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내 동생은 육지로 나는 비행기로 평양에 가려던 계획은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동생이 당시 총무처 찦차를 얻어 그것을 타고 육지로 일로 북으로 평양을 향하여 달려갔다. 이때는 추운 겨울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2월 24일이었다.
平壤으로 가는 길
총무처 직원 두 명과 아우인 성악(性岳) 내 매부 방성희(方聖熙)와 같이 지옥 길 같은 어두운 밤길을 왕모래가 눈앞을 가리 우는 풍진을 헤치고 우리는 평양으로 떠났다.
노상에는 해륙 만리 이국에서 인류의 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이 땅에까지 출전한 외국인들의 이동부대와 전승장구 북으로 북으로 노도와 같이 적을 따라 처 올라가는 우리 국군 부대들이 눈에 띄일 뿐이었고 민간인의 차라고는 한대도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은 24일 밤늦게 드디어 아버님의 유해가 계신 평양에 도착하였다. 도착 후 우리는 내 매부 방씨의 친구인 전춘식(全春植)씨가 바로 평양 경향신문사 지사장이었던 관계로 우선 그리로 찾아가 숙소를 정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는 방법으로 다음날 평양시내에 포스터 약 60매를 써서 요소요소에 붙였다.
그 내용은 국립서울대학교 총장 최규동의 아들이 경향신문사 지사에 와 있으니 고인의 소식을 아는 인사는 내사하여 주시기를 바란다는 문구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활동을 개시하여 평양감옥으로 찦차를 달렸다.
이 감옥에는 그때 간수장이하 13명의 간수가 잔류해 있었으므로 이들을 보고 내 아버님이 계시던 감방을 물어보니 제 13호 감방을 들여다보니 어찌나 협소한지 아버님이 사망하기 직전에는 방의 대각형으로 시체를 모셨다고 하였다. 병환을 가진 몸이니 감방의 인사들이 편안케 하기 위하여 몸을 대각선 상태로 하여 임종 시까지 와상케 하셨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 13호 감방내의 서쪽 벽을 보니 의외에도 아버님이 사용하던 미국(美國)식 탈장대가 그때까지 걸려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이 탈장대는 내 아버님이 본래 천식이 심하였으므로 우측탈장도 겸하여 내가 탈장대를 사서 드렸기 때문에 눈에 익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내가 보관하고 있다. 그 탈장대를 떼고 곧 감방에서 돌아가셨구나 생각하니 이 지옥 같고 무서운 절망의 아성속에서, 무서운 고통 속에서도 태연하려 했고 또 철저한 신념과 생의 희망을 버리지 아니하고 안도와 평화를 얻으려고 애쓰시던 모습이 눈앞에 훤하여 자연히 흐르는 눈물을 막을 길 없고 솟아오르는 분통과 쓰라린 심정을 무어라 표현할 수 없었다.
드디어 묘지를 찾다
우리는 한참동안 명상에 잠겼다가 즉시 탈장대를 거두어 가지고 놈들이 우리의 애국인사 3백여 명을 학살했다는 우물가로 갔다.
이것이 바로 조 내무장관이 이야기하였던 우물이다. 우물 속에서는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고 무수한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아! 참혹하여라. 사람이 사람을 이같이 많이 때려죽이다니, 또 같은 동족끼리 같은 형제끼리…….
그때 이몽필(李夢弼)이라는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우익인사로서 잡혀 와서 감옥생활을 하면서 죄수로 또 의사로서 기술을 제공하고, 난을 면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이(李)의사는 내 아버님의 주치의인줄만 알았지 그 외에는 알도리가 없었다.
이때 내 매부의 말이 평양시청에 가서 의사 명부록과 주소를 알아보자 하기에 즉시 시청으로 가서 그곳에서 주소를 알아냈다.
감옥에서 사망한 사람중 1950년 9월 30일 이전의 사망자에게는 다 묘지 앞에 표식, 명패를 붙였으나 9월 30일 이후의 사망자는 유엔군의 폭격이 극심하여 시체에 표시를 못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버님의 시체를 찾기 위해 3, 4개 처의 공동묘지를 찾아서 동분서주 하였으나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내 매부의 말에 의하면 군정시대 서울대학 총장이었던 이춘호(李春昊)선생의 묘지도 있더라고 한다.
우리는 이(李)의사와 인부 3인과 같이 최종적으로 용산(龍山) 공동묘지를 찾았다. 이곳은 평양에서 진남포로 나가는 길 약 30리쯤의 거리에 있었다.
슬픈 先死의 相面
이 묘지에는 이(李)의사 자신이 매장한 시체가 30곳이나 있는데 이곳이 분명하다하여 한곳을 파보았으나 아니었다. 그러나 끝에서 둘째 번 관을 파는 도중 관위에 최규동이라고 쓴 사각형 나무패가 놓여있고 구부러진 못 두개와 빳빳한 못 한 개가 관 위에 박혀 있음을 내 매부가 발견하고 즉시 시체를 다시 보았다.
양지쪽에 면한 곳이라 이미 탈육이 되었음으로 몇 가지 증거물을 가지고 시체를 확인하였다.
그 시체가 나의 아버님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점은
1, 관위에 아버님의 명함이 씌어 있었고
2, 안동포 고이적삼을 입으시었고
3, 다님을 특수하게 치는 점
4, 입치(入齒)를 하셨으며
5, 하지는 아직 탈육이 되지 않았는데 아버님의 피부색과 똑 같았다.
발견 즉시 내 매부는 울음을 터뜨렸고 이와 동시에 같이 온 일행이 한동안 통곡을 하고나서 다시 고이 매장한 후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다시 공동묘지로 찾아갔다.
관을 준비하고 수위를 짓고 광목과 종이 등을 준비하여 이관을 하고 경향신문사 2층에 다시 임시로 모셔다가 친구이며 가까운 조객들이 와서 눈물로서 사모하고 그지없는 슬픔에 옷깃을 적시었다.
그때 특히 김성주(金聖柱)지사도 조객중의 한 사람이었고 지사의 알선으로 트럭을 내주어서 아버님의 유해를 모시고 일로 남하하여 서울로 향하였다.
11월 28일 밤 서울에 도착하여 수송동에 있는 중동(中東) 중 고등학교 교장실로 안치하였다.
교장실에 안치한 후 7일장을 결정하여 그 당시 안호상(安浩相)씨의 주선으로 교육장으로 모시게 되어 유해는 경북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 광봉산에 안장하였습니다. (월간 북한 .1972년 6월호, 북한연구소)
* 백농선생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여러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1991년 10월 1일자 동아일보에서는 귀순한 전 북한 정무원 부부장 신경완씨의 증언을 토대로 1950년 10월 18일 평양인근 龍城에서 미군의 공습으로 폭사하셨다고도 하고, 또 다른 증언으로는 인민군의 무차별 총격으로 옥에서 정인보선생과 함께 사망하셨다고도 하나 사실과는 다른 것같습니다. 아마 자제 분인 최성장선생의 증언이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67회 이명학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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