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中東학교와 海印중학교
- 이명학(67)
- 2013.04.04 22:35
- 조회 555
- 추천 0
우리 中東학교와 海印중학교
공비(共匪) 해인사(海印寺)에 방화, 학생 등 30여명 납치
지난 13일 밤 합천 해인사에 공비 수 십 명이 침입하여 해인대학생 7명, 서울 中東學校 학생 23명, 해인사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 헌병 1명과 경비원 1명을 각각 납치하는…… (東亞日報 1952.7.18)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52년, 지리산으로 숨어든 인민군 패잔병들이 해인사로 내려와 민간인을 납치해 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 납치된 사람 중에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 학생이 23명이나 있었다. 왜 서울에 있던 중동중학교 학생들이 전쟁 통에 한 두 명도 아니고 23명이나 해인사까지 내려가게 되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리저리 자료를 찾아보니 이 학생들은 서울에서 내려간 중동중학교 학생이 아니라, 해인사 경내에 있던 ‘중동중학교 해인분교’ 학생들이었다.
한국전쟁으로 백농 선생님은 1950년 납북되시고, 중동중학교는 1951년 9월 1일 부산에 임시로 피난학교를 개교하였는데 당시 교장은 조은택(趙殷澤)선생이었다. 그 즈음 조은택교장님은 부산으로 찾아온 해인사 제13대 주지 최범술(崔凡述 ; 1904-79)선생의 간곡한 요청으로 해인사 경내에 ‘중동중학교 분교’를 설립하기로 합의하였다. 최범술선생은 법명이 효당(曉堂)으로 1948년 국민대학을 설립하여 1949년까지 국민대학 재단이사장으로 있었으며, 해인사에 해인대학(현 경남대학교 전신)을 설립한 분이다.
최범술선생은 중동중학교 분교 설립이 결정된 후 국민대학 제자 4명(전창범, 홍정표, 이대영, 김병철)과 함께 해인사에서 분교 개교에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제자 중 한 사람인 홍정표선생이 쓴 분교 설립에 따른 보고서를 보면
“1. 창설 동기 : 기억에 아직도 역력(歷歷)히 아름하는 조국 동란의 역사적인 6.25 수난으로 말미암아 민족은 도탄에 빠지고 찬란한 우리 교육 문화는 사변의 세례를 입어 조국 흥망의 결단을 차제에 더욱이 생각하고 매진함이 제2세 학도들의 본분이건만 그들에게는 문호의 길이 비좁아 낙오해 농촌에서 농촌으로 허송세월로 자멸의 함몰로 진공(眞空)하는 자가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이래서야 조국의 새날을 어찌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에 깊은 뜻을 둔 최범술 선생님 및 조은택 선생님의 양자(兩者)간에 드디어 단기 4284년(1951) 8월 28일 의의 깊게 한자리의 성스러운 회합을 갖게 되었으니 여기에서 서울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의 전통을 살림과 동시에 국가민족의 제2세 운명의 역사(役士)를 널리 양성하자는 뜻이 일치되자 근본적으로 해인사 구내에 분교를 신설할 것을 이구동성으로 수의(受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발분된 최범술 선생님 이하 몇 동지(전창범, 홍정표, 이대영, 김병철)는 단기 4284년 9월 7일 부산을 출발하여 해인사에 도착하자 곧 그 책무에 착수하는 한편, 뜻 있는 지방 유지인사 및 해인사 여러 스님들의 찬의(贊意) 협조와 아울러 주야 고심(苦心) 혈성(血誠)한 대가로 오늘의 우리 중동중학교 해인분교가 비롯하게 된 것이다.
2. 창립 연월일 : 단기 4284년 9월 12일
3. 연혁 : 단기 4284년 9월 7일 최범술 선생님 이하 현 교직원(전창범, 홍정표, 이대영, 김병철) 4명이 부산을 출발하여 단기 4284년 9월 10일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에 도착하였다. …… 우리 4명은 단기 4284년 9월 12일 최범술 선생님의 형식적인 가임명(假任命)으로 교직원이라는 대명사 아래 본 분교 발족 본 사무에 착수하였다. …… 단기 4284년 9월 1일부터는 각 기관에는 학생 모집의 공문을 띄웠고 합천군 및 거창군의 방방곡곡에는 학생 모집의 광고문이 한 벽을 점하게 되었으니 이로 인해 단기 4284년 9월 28일을 기하여 신입생 제 1차 고시를 시행하게 되었다. …… 단기 4284년 9월 30일과 10월 3일 제2차에 걸쳐 시험을 보는 한편 10월 10일을 개학식 일자로 정식 결정하고 10월 15일부터 정식 수업을 시작하기로 정했다. ……
4. 기본 방침 : 본 해인분교는 서울 중동중학교 본교를 기반으로 하되 해인사 경내에 영속 설치할 것을 근본 목적으로 토대한다.”
초대 교장은 중동중학교 조은택교장이 겸하셨고, 음악 선생님은 국민대학 직원 중에서 중동 출신이 맡아 중동중학교 교가를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해인분교 교표는 우리 중동과 똑같은 것으로 하였으며, 모든 대내외 공식·비공식 문건도 중동중학교 명의를 정식으로 사용하였다. 현재 해인중학교 교기(校旗)를 보면 언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모양이 우리 중동의 교표와 매우 흡사하다.
이렇게 시작한 중동중학교 해인분교는 개교한지 1년도 안된 1952년 7월 해인사에서 벌어진 공비들의 학생 납치 사건(납치되었던 23명 중 1명은 빨치산과 함께 남았고, 1명은 피살되었으며 나머지 21명은 무사히 돌아옴)으로 문교부로부터 해인대학과 함께 폐쇄조치를 받는다. 행정처분에 따라 해인대학은 진주로 이전하였고, 중동중학교 분교는 가야면 면소재지로 옮겨 면사무소 창고에서 수업을 하게 된다.
그 뒤 전쟁이 끝나고 피난 왔던 학교들이 속속 서울로 돌아가자 1952년 7월 30일 <재단법인 해인사>가 중동학교 분교를 인수하면서 중동중학교 해인분교 시대는 그 막을 내린다. 양측은 1953년 중동학교 분교로 입학한 학생이 졸업할 때까지 중동중학교 졸업장을 주기로 합의하고 1956년 2월 23일 졸업식장에서 중동중학교 졸업장을 마지막으로 수여하였다.[29회(31명), 30회(21명), 31회(37명). 32회(29명), 33회(93명)] 중동중학교 해인분교 동문은 모두 211명이다. 그 후 1957년부터는 해인중학교 명의로 졸업장[1∼5회 중동중학교 졸업장 / 6회부터 해인중학교 졸업장]을 주게 된다.
지금도 매년 우리 중동중학교 졸업식에 저 멀리 해인중학교에서 교장님과 교직원이 상경하여 함께 축하해 준다고 한다. 지란지교(芝蘭之交: 벗 사이의 맑고도 높은 사귐)! 우리 중동과 해인중학교는 지금까지 60여 년 동안 향기로운 지초(芝草)와 난초(蘭草)처럼 고귀한 우의를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세상에 널리 알릴만한 아름다운 인연이며 전통이다. 앞으로도 양교의 우정이 변함없이 영원히 이어지기 바란다.
학술·홍보위원장 67회 이명학(성균관대 교수) 씀
17개의 글
- 구독자: 1명
글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조회 |
---|---|---|---|---|
17 | 박형준(70) | 25.04.11 | 69 | |
16 | 총동문회 관리자(82) | 24.04.17 | 124 | |
15 | 총동문회 관리자(82) | 23.11.03 | 115 | |
14 | 총동문회 관리자(82) | 23.09.08 | 200 | |
13 | 조영협(70) | 19.11.25 | 214 | |
12 | 정태온(64) | 13.07.12 | 735 | |
11 | 이명학(67) | 13.05.19 | 587 | |
10 | 총동문회 관리자(82) | 13.05.03 | 386 | |
9 | 이명학(67) | 13.04.26 | 551 | |
8 | 이명학(67) | 13.04.24 | 6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