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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교가와 권덕규 선생

 아래 글은 34회 이병주선배가 기억하는 중동 교가를 작사한 권덕규선생에 대한 모습이다. 당시 수많은 대학자들이 백농과 교유하였지만 교가 작사를 굳이 권덕규선생에게 맡기신 이유와 조국을 잃은 한 지식인의 고뇌 그리고 교가를 통해 제자들에게 높은 이상과 넓은 포부, 굳건한 의지와 씩씩한 기상을 일깨우려한 권덕규선생의 깊은 뜻이 잘 보인다. “벌개이는 새배 빛을 그러안아서 그늘지는 그 곳까지 비추일 마당”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67회 이명학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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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동의 校歌와 권덕규 선생

 

                                                                                 이병주(34회. 동국대 명예교수)

 

 워낙 中東의 명칭은 ‘大東의 中央’이라 ‘東中’인데, 음조가 고르지 못해 ‘中東’이라 지어졌다. 그리고 校歌는 1925년 본과가 당국의 중등학교 학력인정을 받고 나서 비로소 작사되었고, 또한 교표도 그냥 ‘中東’이 아닌 무궁화 받침에다 해돋이 위에 ‘中’자를 부각한 디자인은 당시의 미술담당이셨던 유형목선생의 작품으로, 실은 국내에서 제일로 꼽는 교표로 일컫는다.

 

당시 中東에는 권병훈선생의 세계적인 한자자전인 <육서심원(六書尋源)>의 발간을 위해 당대의 대가인 정인보 ․ 최남선 ․ 임규 선생이 각기 백농선생을 찾아 자주 드나드셨다. 그런데 소중한 교가의 작사를 굳이 권덕규선생(1890~1950)에게 맡긴 사연은, 권선생은 당시 조선어 담당교사로서 백농선생의 中東정신을 익히 심화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였다.

 

 사실 권선생은 당시 휘문과 중앙학교에도 출강하시는 한편,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초안하셨고, 또한 <한글큰사전>에 실을 상말조사를 도맡으셨다. 그래서 선생께서 종로1가 양편에 즐비했던 상점거리에서 상두꾼과 인력거꾼, 그리고 조근꾼에 곁따르는 하치들과 관계없이 차마 농을 하며 막걸리를 나누신 탓으로 학생들의 하학 때 공손히 모자를 벗고 경례를 올리면 그들에게 ‘골패, 모주’라는 놀림을 받으셨지만, 학생들의 존경은 드높았었다.

 

 권선생은 약주가 대단하셔서 매양 거나하신 모습으로 수업에 임하셨다. 그러나 한 번도 흐트러짐이 없으신 꼬장꼬장한 몸가짐이셨다. 항상 삼팔이나 시양목 두루마기에다 연회색 바지에 옥색 다님을 단정히 치신 오롯한 선비이셨다.

 

 딴은 中東의 교가는 다부진 명랑감투, 곧 中東의 정신을 절마다 갈무려 中東人의 진로를 부르는 동안에 스스로 깨치게 한다. 그리고 안기영선생 작곡의 멜로디는 사뭇 위축돼서 체념적인 학생들의 심성을 자못 부추겨서 적극성을 띠어 진취적인 다짐을 안겨 주어 부를수록 신난다.

따라서 높은 이상과 넓은 포부, 굳건한 의지와 씩씩한 기상을 끼치는 우렁찬 울력이 가멸차다. 벌을 개이는 해돋이의 새벽빛이 그늘까지 비치는 마당인 대동의 中東임을 마디마다 강조한다. 저마다 각 길을 향해 모인 선랑에게 한 결 같이 슬기를 갈닦고 뛰놀면서, 모름지기 작은 샘이 내가 되어 바다를 이루어 저마다의 보람을 다져서 소망의 떳떳한 쟁취를 환기시키는 中東의 지남철인 교가다.

 

이제 우리 中東은 서울 복판 수송동의 요람을 박차고 청운의 새 터전인 강남에다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바야흐로 해묵은 전통의 역사를 현대의 실리콘으로 개신하기에 나위가 없는 中東이다. 이런 뜻에서 우리 中東의 校歌는 마지막 제3절까지 두루 불러야 비로소 그에 도사린 떳떳한 자립정신을 다잡을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재학시절에는 校歌를 외서 써야만 음악점수를 주신 멋쟁이 정순철 선생이 계셨다.

 

 꿈을 현실화하는 입지전적인 인물, 곧 소극적인 구호 ‘하면 된다’가 아닌 ‘해야 산다’는 적극적인 명랑감투로의 길이 다름 아닌 세계화의 지름길이다. 섣불리 외치기나 하는 애교는 잠꼬대에 불과하다. 애교가 바로 애국이요 나아가서는 애족이다. 이른바 거느리는 사자의 中東은 마땅히 校歌를 본으로 매진해야 세계의 中東은 이윽고 다가오게 마련이다.

 

일찍이 권선생께서는 1938년 일제의 조선어 교육 폐지령으로 해서 中東을 떠나시게 되자, 우리는 한복 한 벌을 마련해서 바쳤더니 다음의

 

물건도 보암직고 보다 속이 더욱 조여 이렇게 얽힌 속은 드렁 칡 서리로다.

풀으려 풀으려 하되 못풀 속 정이라.

 

는 시조를 곱다랗게 판서하시고 안간힘에 찬 나직한 목소리로 엄숙하게

 

 강한 쇠는 부러지느니…. 우리 겨레는 포악스런 외세에 꺾이지 않고, 우리의 말과 글과 풍속을 대물려 이었네. 성하면 쇠하는 법이니, 자네들 어려운 곱에 다다르면 부디 中東校歌를 외우게나.

 

라고 하시고는 하염없이 교실을 나가시는 걸음은 예전 같지 않았다.

 

 해방 후 활기찬 국학열에 힘입어 선생의 저서인 『조선사』가 사뭇 날개가 돋힌 듯 팔려나가, 그 두둑한 저자에의 인세를 받으시자, 매일 무교동 선술집을 드나드시다 1950년 초여름 노량진 행 전차도 끊어진 한강대교를 휘청거리며 건너 흑석동 댁으로 가시다 실족해서 익사하셨을 것이라는 소문만이 파다한 선생의 최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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