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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소설 그 거짓과 참

 

황당한 소설 그 거짓과 참

 

 얼마 전 블로그에 연재된 <해공 신익희>라는 소설을 네이버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 중 우리 모교와 백농선생에 대한 부분이 있어 흥미를 가지고 읽다가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소설인데, 얼마 전 제가 썼던 ‘김천고등학교 설립자 최송설당 여사’와 연관 지어 터무니없이 쓴 것이었습니다. 허위 사실을 마구 엮어 글로 쓰는 행태에 화가 나서 소설을 게재한 사람에게 진위여부를 물었지만 아직까지 아무 답이 없었습니다.

 만약 지금 사실을 밝혀 해명해 놓지 않으면 후에 이러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우리 중동과 백농선생을 폄훼할 사람들도 분명히 생길 것입니다. 긴 소설이어서 다 게재할 수는 없고 해명할 부분만 줄여서 게재하고 허위사실에 대해 바로 잡도록 하겠습니다.

- 학술 ‧ 홍보위원장 67회 이명학 씀

 

                <소설 해공 신익희> (10-1)

 

“서울에서 고향 친구인 안일영이 신익희를 찾아왔다.

안일영은 신익희의 선배인데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서울에서 고종황제의 엄비와 가깝게 지내고 있는 송설당 교육재단 일을 보고 있었다. [바로 잡기 : 이 소설의 시점은 신익희선생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막 귀국한 1917년이다. 이 당시 김천고 설립자 최송설당은 궁에 있었으며 교육재단을 따로 만들 상황이 아니었다. 최송설당은 궁에서 나온 후 1930년이 되어 김천학교 설립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그는 와세다 대학 까지 나온 사람이 시골구석에서 농촌 계몽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신익희에게 서울로 같이 가서 자기의 교육재단 일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신익희는 처음에 서울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농촌 계몽 활동을 할 것을 고집 하였으나 중동학교를 설립한 신규식이 설립한 학교라는 사실이며 중동학교가 폐교 위기에 놓였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잡기 : 중동은 신규식 선생이 설립하지 않았으며 신규식선생은 4대 교장이었다. 중동이 폐교 위기에 놓인 것은 1915년이고 신익희 선생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17년으로 신익희 선생은 중동 폐교 위기 사실을 알 수 없다. 신익희선생은 귀국하던 1917년 중동학교에서 1년 안되게 교편을 잡다가 보성법률학교로 이직한다.]

송설당 교육재단은 최송설당이라는 한 여인이 만든 재단으로 고종 황제의 계비인 엄비가 누룩곡에 있는 절에 자주 드나들다가 결혼도 않고 절에서 살고 있던 묘령의 40세 여인이 엄비가 절에 나타나면 극진히 예우를 하자 마음에 들어 궁중으로 불러 들여 이은 황태자를 보모로서 임명 하였던 여인이었다.

송설당은 원래 고향이 경북 김천 출신으로 아버지 최창환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귀엽게 자랐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버지 최창환이 의병 활동에 휩쓸리면서 가족은 풍지박산[바로 잡기 : 최송설당 여사의 부친은 의병활동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다만 최송설당 증조부가 홍경래 난 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집안이 몰락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최송설당이 고종에게 억울한 사실을 아뢰고 집안의 명예를 되찾았다.] 되고 그녀는 어머니 손에 의하여 사찰에 맡기어 지었고 엄비가 사찰에 드나 들 때 그 인연으로 엄비의 눈에 들어서 황태자의 보모로서 발탁 되었던 것이다.

하루는 최송설당의 친척되는 최규동이 안일영을 찾아오게 된다.[바로 잡기 : 최송설당과 백농선생은 친척이 아니다. 최송성당은 和順 최씨이고, 백농은 永川 최씨이다.]

마침 최 송설당이 궁중에 들어가고 없는 때 인지라 자연히 최규동은 안일영을 만날 수 밖에 없었다. 최규동이 말을 꺼냈다. [바로 잡기 : 안일영선생과 백농선생은 1905년 서울에 있던 光成실업학교에서 처음 만났으며 백농선생께 유일선이라는 당대 수학계 최고 학자를 소개해 준 분이 안일영 선생이다. 안일영 선생은 백농이 중동을 인수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안선생, 송설당 어른이 학교를 설립 하신다는데 어찌되었소?"

"송설당님은 무턱대고 뜻만 가지면 다되는 줄로 아시는데 정말 고민입니다"

"안선생"

최규동이 무슨 말을 할 것 같은데 망설인다.

"무슨 말씀이오?"

"신규식 선생의 사재를 털어 세운 학교인데 그분이 떠나고 나니 중동학교가 운영난으로 폐고 직전에 있습니다." [바로 잡기 : 중동은 신규식선생이 사재를 털어 만든 학교가 아니다. 백농께서 중동 설립자가 누군지 몰라 이리 말씀하셨겠는가?]

"무슨 말씀인지?"

"종친 어른이신 최여사님의 도움을 받아 볼까 해서요" [바로잡기 : 위에 언급한 바 같은 최씨지만 본관이 다르며 친척이 아니다.]

"망해가는 학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말씀이 아닙니까?"

"예 바로 그겁니다 "

"송여사님은 오로지 아버님이 의병 활동을 하시다가 돌아 가셨던 김천에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하는데 ...."

"제가 최여사님을 직접 설득할 터이니 안선생이 좀 도와주십시요"

결국 안일영은 겨우 겨우 설득하여 최 송설당의 돈 일부를 중동학교 회생비로 쓸 수 있게 허락은 받아내었다. [바로 잡기 : 안일영 선생은 1919년부터 중동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중동이 폐교 위기에 놓였던 것은 1915년이다. 중동학교 교사인 안일영선생이 백농선생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최송설당은 이 때 궁에서 영친왕 이은 황태자의 보모로 있을 때이며 김천학교를 세우려고 했던 것은 1932년이다. 1915년 중동 폐교 위기 때 이야기라면 어떻게 15년 전에 김천학교 설립 자금을 빌릴 수 있었겠나? 앞 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다.]

폐교 직전의 중동학교는 이렇게 하여 소생하였다. [바로잡기 : 중동은 1915년 폐교 위기에 놓였고 당시 수학선생이었던 백농선생께서 중동을 폐교시키려던 설립자 유광렬선생에게 빚200원과 도장, 졸업생 명부만을 인수해서 예전 수송동 교사 근처에 있던 한옥 한 채를 월세로 빌려 나온 것이다. 당시 중앙학교와 휘문학교 교사로 받던 봉급 중 한 학교 월급을 월세로 충당하고 학생들이 낸 월사금을 절약하여 학교를 본 궤도에 올려놓았는데, 마치 돈을 빌려 학교를 소생시킨 것처럼 허위 사실을 쓰고, 그것도 당시 궁에 있었던 최송설당과 근거도 없이 연결 지은 것은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황당하기 그지없다. 최송설당이 직접 쓴 글이나 당시 간행된 신문, 잡지 어디에도 백농께서 송설당에게 돈을 빌렸다는 기사는 단 한 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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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학 교수님, 왜곡된 역사기록을 바로잡지 몾하면 긴시간이 흐르면 오해의 소지가 있읍니다.
    반듯이 바로잡아야 할것입니다. 
    학술홍보위원장님 화이팅!!!!!!!
    반드시 저자에게 해명을 듣고 그 해명글을 보관해놓아야하지 않을까요? 그냥 소설 허구라는 둥..의 해명글을.
    이명학교수님  정말로 훌륭하십니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그렇게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는 자는 엄단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위대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왜곡하여 식민지사관으로  조작해 놓아 우리 또한 여과없이  그것을 배웠던 세대입니다   항상 진실은 진실로  전해져야 합니다   중동인이여 영원하라!  중동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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